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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버려진 우리 국민-재북 월남전 국군포로 구출해 와야

기사승인 2018.05.18  09: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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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국 법학박사, 경민대학교 (前)교수⋅도서관장, (예)해병대위

조성국 법학박사, 경민대학교 (前)교수.도서관장, (예)해병대위 ⓒ동부교차로저널

5월 10일(미국시간) 북한에 억류돼 있던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김상덕, 김학송 씨 등 3 김씨가 미국으로 귀환했다. 미국 대통령(도널드 트럼프) 및 부통령(마이크 펜스) 내외가 함께 새벽 2시30분경(현지시간) 앤드루스 공군기지로 직접 마중을 나가 귀환한 이 3명을 맞이했다.

필자(筆者, 월남전 참전자, <예>해병대위)는 이들 3 김씨를 북한에서 구해내는 것을 보면서, 미국이란 나라는 미국적을 갖고 있는 미국 시민이라면 인종이나 종교를 가리지 않고, 자국민을 구조하기 위하여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미국이 위대한 나라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아울러 한국인 입장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는 몹시 부럽고 미국에 대하여 경외심마저 들었다.

필자는 우리 국민 중 잊혀 진 국민, 우리나라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는, 현재 북한에 있는 월남전 국군포로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착잡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파병인 월남전참전부대의 전·사상자와 포로 상황을 살펴본다.

우리 군은 1964년 7월~1973년 3월까지 연병력(延兵力) 324,864 명이 월남전에 참전, 5,099명이 전사했고, 10,962명이 부상, 4명이 실종되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때 소수의 한국군이 적군에게 포로가 돼 월맹(공산진영)으로 끌려갔으며, 그들 중 극소수가 북한으로 강제 압송되어 현재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는 버려진 국민이다.

안학수(安鶴壽·1943년 생) 하사(주월 비둘기부대 제1이동외과병원 통신병)는 귀국을 1주일 앞둔 1966년 9월 9일 사이공시(현 호찌민시)에서 실종됐다. 이듬해(1967년) 3월 27일 북한 방송에 출연해 자신을 '자진 월북자'로 소개하면서 그 가족들의 고난사(苦難史)가 시작되었다.

안 하사의 부친 안영술 씨는 대구사범학교(박정희 전 대통령 동문)출신으로 동부초등학교(경북 포항)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슬하에 5형제를 두었고, 학수는 둘째 아들이었다. 안영술 씨는 교장직에서 물러나 강원도 횡성의 교재 창고에서 일하는 임시노무원으로 쫓겨났다. 집안은 ‘월북자 가족’으로 몰려 쑥대밭이 되었다.

‘졸지에 빨갱이 가족이 된’ 안 하사의 아버지는 2001년 임종하며 “원통해서 눈을 못 감겠다. 용수 네가 꼭 해결하라”라고 유언, 안 하사의 동생 안용수(66) 목사는 끈질기게 달라붙어 투쟁하였다. 안 하사의 어머니(남금순)도 화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고, 가족들은 연좌제(緣坐制-1980년 8월 1일 폐지)에 묶여 많은 고통을 당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누명이 영영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귀순간첩 정상환 씨(1969년 9월 귀순)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었다(경향신문 1992년 5월 12일자). 정상환 씨는 1967년 4월부터 ‘의거자정치학교’(평안남도 대동면)에서 1년 동안 안학수 하사와 같은 내무반 생활을 했다. 정 씨는 “안 하사가 베트콩에 포로로 잡힌 뒤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끌려오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김용규 씨(1976년 9월 남파됐다가 남한으로 망명, 인민군 대좌)는 “안 하사가 1975년 북부 국경(중국쪽)으로 탈출하려다 북한 당국에 체포돼 총살당했다”고 증언하였다.

안용수 목사는 집요하게 형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위와 같이 안 하사가 월남에서 월맹군에 의해 납치된 뒤 북한에 넘겨졌고, 1975년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총살됐다는 증언과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정부는 2008년 10월 ‘안학수 하사에 관한 사실조사를 위한 정부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정부합동조사단은 월남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한 뒤 조사보고서를 내놓자, 통일부에서 납북자 판정심의를 통해 안학수 하사를 납북자로 인정하였다.

결국 국방부 국군포로대책위원회는 2009년 9월 1일 안학수 하사를 ‘국군포로’로 인정, 안 하사는 월남전 한국군 공식포로 1호가 되었다.

마침내 2009년 12월 1일 육군으로부터 안학수 하사의 전사통지서를 유가족들이 받았다. 안 목사는 "전사통지서를 받았을 때 40여 년 간 가족들의 숨통을 조여 온 올가미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했다 실종된 뒤 북한 체류가 확인된 사람은 안학수 하사(총살)를 비롯, 김인식 대위, 정준택 하사, 박성렬 병장 등이다.

2005년 7월 8일 국립 대만대학 법률학원(법과대학)에서 “중국 ․ 대만(兩岸)과 남 ․ 북한의 교류법제의 동향과 과제”라는 주제로 개최된‘한국 ․ 대만 공동국제학술회의’에 필자가 종합토론자로 참석, 토론시간에 주제발표자들에게 재북 월남전 국군포로가 수년 째 억류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귀국시킬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제의하였다. 그러자 주제발표자는 난감한 표정….

필자는 월남전참전자로서 동병상련(同病相憐)에서 ‘재북 월남전 국군포들을 속히 데려와야 한다고 언론을 통해 몇 번 외쳐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요즘 촛불의 힘이 세다고 하므로 이제 촛불에게 호소한다.

“촛불아 -! 이들을 돌리도(돌려다오)-!”

교차로저널 webmaster@www.kocus.com

<저작권자 © 교차로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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